김언수. 캐비닛 어떤 순간에도 휘발유만 넣어주면 되죠. 잠이 부족하다거나,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거나,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거나 하는 문제들로 일을 그르친다면 곤란하죠. 그것은 결코 프로라고 볼 수 없어요. 그런 태도로는 현대사회에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식단이 이런 문제점을 낳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빵과 고기만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식단은 인간을 결국 신뢰할 수 없고 게으른 존재로 만들죠. 휘발유는 인류의 새로운 대안입니다. 주위를 보세요.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속도의 천국이죠. 그러니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 휘발유 마시는 남자.
"요리사와 건축가가 비슷해요?" "저는 그런 거 같은데요?" "뭐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그렇지만 직업이 다르면 아무래도 조금은 다른 삶을 살게 되지 않나요?" "글쎄요. 저는 종종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상상하고 내가 가지 않은 인생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봐요. 그런데 그와 항찬 대화를 나누다보니 수없이 많은 선택과 갈림길에도 불구하고 결국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고 외형상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결국엔 저랑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죠. 취미도 비슷하고, 식성도 비슷하고, 퇴근 후에 하는 일들이랑...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글쎄요.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불행인가요, 다행인가요?" "불행도 다행도 아니에요. 이런 건 우리 삶에 그냥 있는거죠. 저 바람처럼 저 나무처럼." - 도플갱어를 만난 남자.
"혹시 타임머신 같은게 발명된다면 당신이 삭제한 1998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돌아가고 싶어요. 솔직히 1998년에서 기억나는 거라고는 홍당무밖에 없지만." "무섭지 않나요?" "무서워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시절은 없어요. 그런 시절이 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않을 거예요. 우리는 행복한 기억으로 살죠. 하지만 우리는 불행한 기억으로도 살아요. 상실과 폐허의 힘으로 말입니다." - 기억을 수정하는 메모리자이커.
나는 인간은 세계의 거울이라고 배웠다. 나는 봉곤씨를 알고 난 후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표상을 의심했다. 봉곤씨가 반사해서 보여준 세계는 내가 알고 있는 세계를 전복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봉곤씨가 잘못되었건, 내가 잘못되었건, 그 여자가 잘못되었건, 이 세계가 잘못되었건, 하여간 뭔가 잘못되었다. 그게 무엇이든 뭔가 잘못되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변화다. 그래도 고양이로 변하겠다니 말이 되나, 하고 당신은 여전히 빈정거릴 것이다. 빈정거리지 마라. 그것은 불과 몇 시간 전에 내가 한 말이다. 빈정거리는 것은 현실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며 우리 삶의 어떤 불행도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니 고양이로 변신하는 주문이나 묘약, 혹은 특별한 비법을 알려줄 게 아니라면 제발 좀 닥치고 있어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고양이로 변신하는 마법뿐이니까. - 고양이가 되겠다는 봉곤씨.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