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수. 캐비닛 나는 Y공기업의 부속 연구소에서 일한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연구원이세요? 박사?" 하고 묻는다. 그럼 나는 "아뇨, 그곳에서 자료와 자재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행정직이지요" 하고 솔직하고도 재빨리 대답한다. 솔직하고도 재빨리! 그게 무척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가 끝난 후 나와 상대방은 찜찜하고 서먹서먹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상대방은 뭔가 속았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나로서는 왠지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살짝 든다고나 할까. 물론 이것은 연구원이 아닌 사람이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느끼게 되는 자격지심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병원에서 일한다고 모두가 의사는 아니며, 공군에 근무한다고 모두가 전투기 조종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조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투기가 거꾸로 날거나 논두렁에 처박혀서 경운기의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해선 누군가 그 큰 바퀴를 제대로 갈아끼우고, 비행기 이곳저곳을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하며, 또 누군가는 깃발을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조종사와 비행기만으로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것,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폼나지 않는 일을 해줘야만 비행기가 논두렁이나 하수구에 처박히지 않고 하늘을 제대로 날 수 있다는 것,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거다. 대표성의 잣대에 기대지 말고 개별성의 잣대로 사람을 대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성숙하고 깊이 있는 인간관계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존중하는 대화란 이런 것이다.
"어디서 일하시죠?" "H병원에서 일합니다." "하는 일은 재미있으세요?" "때때로요. 저는 X-Ray실에서 방사선 촬영을 하는데, 사람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있다고나 할까요." "내부를 들여다보는 즐거움이라, 와우, 근사하군요." "사람의 몸속에 자기만의 독특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아세요?" "그래요? 처음 듣는 이야긴데요?" "사실이랍니다. 모두들 저마다의 빈 공간이 있어요. 저는 그 공간을 엿보지요. 그걸 보면서 사람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것들을 저곳에 저장해두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요." "굉장하군요." "은밀하죠." "언제 시간 나면 저의 은밀한 공간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저로서야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꼭 한번 찾아오세요. 스페셜로 찍어드리겠습니다. 은밀하게요."
점점 에로틱하게 점점 우아하게 발전해가고 있는 이 대화의 끝을 계속 추적하지 못해 유감이다. 어쨌든 이 대화는 굉장히 우호적이고 뭔가 럭셔리하며 인간 친화적이고 심오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즉 이대화의 분위기는 은밀한 쪽이든 건전한 쪽이든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틀에 박힌 예의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존중이 우리의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그렇지만 내가 평소에 만나게 되는 대화들은 이런 멋진 대화가 아니다. 내가 평소에 만나는 대화는 주로 이런 식이다.
"어디에서 일하시죠?" "H병원에서 일합니다." "(약간 놀라며) 의사인가요?" "(약간 당황하며) 아뇨, 의사는 아니고." "(약간 실망하며) 네... 그럼 뭘?" "X-Ray 실에서 일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뭐 X-Ray 기사죠. 하염없이 X-Ray나 찍어대는." "(완연히 실망하며) 네, 그렇군요." "(할말이 별로 없어 구두를 바닥에 문지르며) 어쨰 날씨가 꿉꿉하네." "(나름대로는 화제를 돌리며) X-Ray 기사는 벌이가 괜찮나요?" "(이 여자가 별걸 다 묻네 하는 표정으로) 뭐 신통찮아요. 허리띠 안 졸라매면 살림 꾸리기가 팍팍하죠." "(이젠 완전히 흥미를 잃고) 요즘은 다 힘들잖아요. 너도 나도 아우성이에요. 경기가 이 모양이니까. 그래도 전문의들은 월 오백 이상은 된다면서요?" "뭐 그렇겠죠. 개네들은 뭐 전문의씩이나 되는 분들이니까요."
이 대화에서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이 보이는가? 나는 물 건너갔다고 본다. 그녀는 재미없고 살림 꾸리기가 팍팍한 X-Ray 기사와의 이 건조한 대화를 금방 잊어버릴 것이고 X-Ray 기사는 그녀를 그저 재수 없는 여자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 도시에서 무수하게 생겨나는 쓸데없고 시시한 만남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