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도 날카롭고 곤두서있는 것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감기걸린 몸을 이끌고 땀을 뻘뻘 흘리며 신주쿠에 있는 영화관에 가서 미션 임파서블을 관람했다. 영화는 예상외로 찰지게 잘 만들어서 못 알아듣는 일본어 자막과 영어 대사에도 불구하고 놀이동산 같은 즐거움을 듬뿍 맞이했다. 팝콘도 맛있었고.
영화 시작 전에 소름돋고 기분나쁜 예고편을 보게 되었는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데이빗 핀처였다. 영화는 아직 안봐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예고편만은 큰 화면에서 귀가 터지게 본지라 "작품"이었다. 그 전에 소셜 네트워크나 벤자민 버튼을 보면서 이 아저씨가 이제 기분나쁜 건 후벼파지 않는 평안한 노년을 맞이하려나보다 싶었는데 아직은 아닌가 보거나 아니면 원래 그럴 생각이 없었나보다.
스웨덴 작가의 소설로 스웨덴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던 걸 데이빗 핀처가 리메이크 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출장오는 분께 부탁하여 이런저런 책을 받았는데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서 스스로 추천이라고 생각했던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도 받았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고 있지는 않고 뽑기로 아무데나 펼쳐서 읽고있는데 오늘 읽은 부분은 고은의 시집 평론. 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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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선생은 당신이 쓴 시들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선생에게 시(詩)작은 호흡 같은 것인가. 누구도 어제 내쉰 숨을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높은 경지이긴 하나, 나는 선생께서 백 편을 써서 서너 편의 수작을 얻기보다는, 백편을 쓰는 에너지로 서너 편의 걸작을 세공하셔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자신의 말년에 '예술가의 말년'에 관해 성찰했다. 해결과 완성의 말년이 아니라 모순과 파국의 말년. 예컨대 청각을 상실한 말년에 이르러 베토벤의 음악 양식은 더욱 전위적인 것이 되었다. "차분함과 성숙함이 기대되는 곳에서 우리는 털을 곤두서게 하고 까다롭고 가차없는, 심지어 비인간적이기까지한 도전을 발견한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유사한 경우를 테오도를 아도르노의 말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아도르노는, 사이드 식으로 말하면 화해 불가능한 것들을 끝내 화해 불가능한 상태로 놔두는 사유를, 내 식대로 말하면 희망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절망의 정의로움을 말하는 사유를 말년에 이르기까지 고집했고, 그것들을 정교하게 세공된 문장들로 옮겼다. 나는 노(老)대가의 이번 시집을 두 번 읽지 않았고 그 점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